설계된 직감, 설계된 빈틈 — 탐닉의 설계자들 북클럽 리포트

Written by Theo2026년 4월 13일 · 5 min read

설계된 직감, 설계된 빈틈 — 탐닉의 설계자들 북클럽 리포트

닌텐도 Wii의 기획자 다마키 신이치로가 쓴 '탐닉의 설계자들'은 사람들이 왜 게임에 빠지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게임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무언가에 빠지는 구조, 직감이라 믿었던 것이 실은 설계자의 의도였던 순간, 예상이 깨졌을 때 오히려 더 몰입하게 되는 역설. 이 책은 제품과 콘텐츠, 나아가 일상의 경험 전반을 관통하는 설계의 원리를 다룬다.

2026년 4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이 책을 중심으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였다. 개발자, 콘텐츠 기획 지망생, 약학 전공자, 공학도까지. 주최자가 준비한 여섯 가지 토론 주제를 따라 각자의 경험을 나눴다. 같은 책을 읽고도 각자의 렌즈로 전혀 다른 장면을 꺼내 놓는 게 인상적이었다. 아래는 그날 나눈 대화를 정리한 기록이다.

직감이라고 믿었던 것들

첫 번째 질문은 단순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설계된 경험이 있는가?" 막상 떠올리려 하면 쉽지 않다. 우리는 보통 그냥 하고, 지나가고, 잊기 때문이다.

"필라테스 옷을 좋아해서 백화점에서 샀는데, 프랑스에서 건너온 브랜드인 줄 알았어요. 이름도 프랑스어고, 모델도 전부 외국인이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 제조 제품이었어요. 그때 되게 배신감을 느꼈어요. 수입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싼 거지, 하면서." — 참가자3

브랜딩이 직감을 설계한 전형적인 사례다. 주최자는 이와 비슷한 예로, 특정 커피 브랜드가 로고에 '1910'이라는 숫자를 붙여 100년 이상의 역사를 암시하지만 실제로는 10년도 안 된 신생 브랜드인 경우를 소개했다. 커머스 회사에서 일했을 때 35만 원짜리 상품을 팔기 위해 55만 원짜리를 옆에 배치했던 앵커링 전략도 직접 사용해 봤다고 한다.

"쿠팡셀러를 해봤는데, 중국에서 사입해 오는 상품이랑 쿠팡에서 파는 상품의 가격 차이가 꽤 크더라고요. 비슷한 물건인데 기획이랑 카드뉴스,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치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 참가자1

"네이버 길찾기에서 최적 경로라고 제시된 걸 따라갔는데, 나중에 보니 더 빠른 길이 따로 있었어요. 시스템이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고 직감적으로 믿어버린 거죠." — 참가자5

넷플릭스의 5초 자동재생도 화제에 올랐다. 주최자는 5초라는 시간이 거부하기엔 너무 짧고, 수용하기엔 충분한 절묘한 설계라고 분석했다. 만약 10초였다면 꽤 많은 에피소드를 다음 화로 넘기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 애니메이션 플랫폼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오프닝 자동 스킵과 자동 다음 화 재생을 모두 기본 설정으로 제공한다. 켜놓기만 하면 1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끊김 없이 흘러간다. 사용자는 '내가 선택해서 본다'고 느끼지만, 실은 멈추는 선택지가 설계적으로 제거된 것이다.

예상이 깨질 때 빠져든다

우리 뇌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예측한다. 예측이 맞으면 안심하고, 틀리면 혼란스럽다. 그런데 때로는 예상이 깨졌을 때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드는 경험이 있다.

"고양이 마리오라고, 기존 마리오의 직관적 규칙을 전부 뒤집어 놓은 게임이 떠올랐어요. 벽인 줄 알았는데 지나갈 수 있고, 밟을 수 있을 것 같은 블록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예측이 전부 깨지는 게임인데 스트리머들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즐기더라고요." — 참가자1

주최자는 진격의 거인, 데스노트, 강철의 연금술사를 예로 들며, 이 세 작품이 결말을 미리 정해놓고 연재를 시작한 드문 사례라는 점을 짚었다. 대부분의 만화는 한 화를 그려보고 반응을 본 뒤 이야기를 채워나가지만, 결말이 확정된 채로 시작한 작품은 1화부터 마지막까지의 빌드업 자체가 치밀할 수밖에 없다. 참가자들도 이런 '설계된 반전'이 일반적인 만화와 차별화되는 핵심이라는 데 공감했다.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인데, 한국 드라마의 해피엔딩 강박이 좀 아쉬워요. 10화까지 너무 재밌게 봤는데 결말에서 실망한 적이 있거든요. 왜 꼭 해피엔딩이어야 하는 거지, 싶었어요." — 참가자2

기대가 깨지는 건 콘텐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헬스를 3개월 했는데 기대한 만큼 몸이 안 변하더라고요. 한번 이탈했다가 목표를 바꿨어요. 멋있는 몸이 아니라 건강 유지와 습관.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까 다시 꾸준히 하게 됐어요." — 참가자5

제품 설계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주최자는 사용자가 화면의 레이아웃을 보고 자연스럽게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예측할 수 있게 만들되, 때로는 그 예측을 전략적으로 깨뜨려 몰입을 만드는 것 — 그 균형이 체험 설계의 기술이라는 이야기였다.

설명하지 않는 힘

책에서 인상 깊었던 개념 중 하나는 '설명하지 않음'의 가치다. 마리오 1-1 스테이지에서는 튜토리얼 한 줄 없이 플레이어가 규칙을 스스로 발견한다. 이 원리는 게임 밖에서도 통했다.

"과외할 때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 방향만 제시하고 학생이 스스로 답을 도출하게 했을 때 기억 보유율이 훨씬 높았어요. 처음엔 솔직히 저도 편하려고 그랬는데, 오히려 효과가 좋아서 지금도 계속 하고 있어요." — 참가자1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본디라는 앱을 깔았는데, 사실 뭐 하는 앱인지도 잘 모르면서 한 달을 썼어요. 캐릭터 만들고, 방에 초대하고. 그냥 뭔지 모르겠지만 재밌었어요." — 참가자2

주최자는 본디를 "사용자가 의미를 후천적으로 부여하는 서비스"로 해석했다. 대부분의 사용자가 의미 부여에 실패했기에 결국 쇠퇴했지만, 반대로 의미를 찾은 사람들에게는 강렬한 경험이 됐을 것이다.

한 참가자가 강레오 셰프의 사례를 꺼냈다. 10년 전 '누군가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의혹이 인터넷에서 바이럴됐지만, 본인은 단 한 번도 해명하지 않았다. 그러다 스승이 은퇴하면서 수제자 명단을 공개했는데, 거기에 이름이 있었다. 10년의 침묵이 곧 증명이 된 셈이다.

"적극적으로 해명한 다른 유명인은 아직도 의혹을 받고 있는데, 아무 말 안 한 쪽이 오히려 깔끔하게 증명이 됐잖아요. 설명 없이 증명한 셈이죠." — 참가자5

주최자는 자신의 회사에서도 제품 설계 원칙 중 하나가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소개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사용자가 의도와 행동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금융 서비스처럼 설명이 불가피한 영역도 있다. 해외 주식 양도세 신고 서비스를 6개월간 개선했지만, 여전히 건강검진 결과서나 주민등록증을 제출하는 사용자가 있다는 사례가 웃음과 공감을 동시에 자아냈다.

만드는 사람의 착각

'내가 좋은 것이 유저도 좋을 것이다'라는 착각. 공급자의 에고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벤츠가 신형 모델에 삼각별 로고를 그릴, 라이트 등 차의 모든 곳에 박아버렸거든요. 디자이너는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소비자 반응은 정말 안 좋았어요." — 참가자5

주최자는 이 문제를 "예쁜 쓰레기"라는 표현으로 정의했다. 엔지니어가 기술에만 몰두해 사용자 가치를 간과하는 현상이다. 국내 게임 업계에서 엔지니어들이 혼을 갈아 넣어 최적화했지만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 프로젝트가 사례로 언급됐다. 기술적 완성도와 별개로 운영 비용과 매출의 간극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고, 수년을 쏟아부은 개발자들이 경력마저 인정받기 어려웠다는 후일담이 뒤따랐다.

"개발자가 기술, 그러니까 How에만 집중해서 사용자 가치, What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기획자 분이 사용자 관점에서 고려한 걸 들어보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측면이더라고요." — 참가자1

모든 일은 What(무엇을 할지)과 How(어떻게 할지) 두 가지로 귀결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코드를 짜는 것, 디자인하는 것, 마케팅 캠페인을 집행하는 것은 전부 How다. 그런데 How에 6개월, 1년을 투자해도 What이 틀리면 아무도 쓰지 않는 제품이 나온다.

사진 전공 경험이 있는 참가자는 다른 각도에서 같은 문제를 짚었다.

"잡지를 직접 만드는 과제가 있었는데, 제가 봤을 때는 나름 잘 만든 것 같았어요. 근데 교수님이 폰트가 너무 많다, 시선 유도 구도가 안 맞는다고 피드백을 주시더라고요. 공급자인 제가 만족한 결과물과 수용자가 느끼는 결과물이 다르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어요." — 참가자2

팀 내에서 의견이 충돌할 때 쓸 수 있는 멘탈 모델도 공유됐다. 내 의견은 내 의견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고객의 의견이라는 프레이밍이다. 엔지니어링 관점의 고객 이해, 마케팅 관점의 고객 이해, 디자인 관점의 고객 이해를 모두 모은 뒤, 고객을 가장 잘 대변하는 안을 고르는 방식이다. 에고 충돌 대신 고객이라는 공통 기준을 세우는 것. 다만 이런 성숙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솔직하게 덧붙여졌다.

우리는 소비자인가, 기획자인가

마지막 주제는 이 책을 읽고 달라진 것이 있는가였다. 참가자마다 반응이 달랐다.

"콘텐츠 기획 쪽에 관심이 있어서, 사람들이 클릭하게 만드는 설계 — 섬네일이라든가 시선을 끄는 구조에 이 책의 원리를 활용하고 싶어졌어요." — 참가자2

"마케팅 설계자라는 책을 읽었을 때 비슷한 충격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도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만든 제품으로 제대로 터져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려고요." — 참가자1

"소비할 때 내 의지로 사는 건지 아니면 유도에 현혹된 건지를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하고 싶어졌어요." — 참가자3

같은 책을 읽어도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은 설계의 도구로, 소비하는 사람은 방어의 기준으로, 개발자는 제품의 원칙으로 받아들인다. 책이 주는 통찰의 방향이 읽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 자체가 이 북클럽에서 가장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약 두 시간의 대화는 20시를 넘기며 자연스럽게 마무리됐다. 정리하면 이렇다.

  • 직감은 설계된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선택의 상당수는 누군가의 의도가 만든 경로 위에 있다.
  • 빈틈이 몰입을 만든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대신 추리의 여지를 남길 때,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를 찾고 더 깊이 기억한다.
  • 만드는 사람의 에고를 경계하라. How에 대한 자부심이 What에 대한 질문을 대체하면, 아무도 쓰지 않는 것을 정성껏 만드는 결과가 된다.
  • 같은 책, 다른 렌즈. 다양한 배경의 사람이 같은 텍스트를 두고 대화할 때, 혼자 읽었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면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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