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현충원에 다녀왔다. 사람이 많았고, 마침 군악대 행사가 있어서 한참 구경했다. 연주가 끝나고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자리에 앉는 동안 옆 테이블에서 한 문장이 잠깐 귀에 걸렸다.
"왜 다들 성공하면 해외로 나가서 살고 싶어할까요."
그게 전부였다. 이어진 대화는 듣지 못했고, 굳이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한 문장이 카페를 나와 걷는 내내 머릿속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걸었던 비석들 사이의 공기와 이 질문이 묘한 각도로 겹쳤다. 비석 앞에서는 한 나라와 한 개인의 관계가 가장 무거운 형태로 떠올랐고, 카페에서는 그 관계를 다시 설계하려는 사람들의 질문이 스쳐 있었다. 무게가 전혀 다른 두 이야기였지만, 공통된 축은 하나였다. 여기에 머물 것인가, 여기를 떠날 것인가. 그리고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저렴함이라는 사회 계약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라고들 한다. 이 말은 대체로 "물가가 싸다"는 감각과 묶여 있다. 그런데 통계를 들춰 보면 이야기가 조금 꼬인다. 한국의 의식주 물가는 OECD 평균보다 약 55% 높고, 식료품만 따로 보면 평균 대비 47% 높다(시사저널, 민들레). 사과, 돼지고기, 티셔츠, 남자 정장, 골프장 이용료 같은 개별 품목은 OECD 평균의 두 배를 넘기도 한다. 사실 "물가가 싼 나라"라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
그럼에도 한국이 살기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절대 물가가 아니라 서비스와 의료와 대중교통과 외식 배달 같은, 일상을 굴리는 가처분 영역의 가성비다. 원하는 시간에 택시를 부를 수 있고, 감기에 걸리면 싼값에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야식이 30분 안에 현관까지 도착한다. 생필품은 비싸도, 시간을 사는 값이 싸다. 이 조합이 한국 사회의 숨은 계약 조건이다.
그리고 이 계약 위에 또 하나의 구조가 얹혀 있다. 근로소득자 세 명 중 한 명은 결정세액이 0원이다. 2024년 국세청 자료 기준으로 전체 근로소득자 약 2,054만 명 중 697만 명, 비율로 33.9%가 면세자다. 반대편에서는 상위 1%의 근로소득자가 전체 근로소득세의 31.2%를 부담한다(서울신문). 일본의 면세자 비율은 15.1%, 호주는 15.5%다. 한국은 생활비 수준이 세계 최상위권인 동시에, 세부담이 소수에 극단적으로 집중된 이례적인 나라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이 여기서 등장한다. 생활의 가성비가 좋아서 대중이 적은 세금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수에게 집중된 세부담이 그 가성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인가. 방향이 정반대인 두 인과가 한 구조 안에 얽혀 있다. 어느 쪽이든, 한국이 살기 좋다는 말의 상당 부분은 이 얇은 균형에 기대어 있다.
저렴함이 가치가 되지 않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미 저렴함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한국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상위 0.3%에게 물가는 사라진 변수다. 변수가 사라지면 다른 변수가 도드라진다. 교육의 질, 공기의 질, 의료 접근성, 거주지의 쾌적함,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권리. 한국의 일상이 주는 가성비가 이 사람들에게는 기본값에 불과하다. 기본값이 된 것은 더 이상 감사의 대상이 아니다. 비교의 무게중심이 '저렴함'에서 '그 외'로 옮겨 간다.
거기에 한 가지 감정이 덧붙는다. 자신이 내는 세금의 상당 부분이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감각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복지를 위해 큰 몫을 내고 있다는 체감 —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떠나, 적어도 그들의 자리에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이 구조가 불공정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 구조 속에 오래 서 있을수록, 왜 내가 여기서 이 비율을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같은 돈, 다른 삶
창업자들 사이에서 꽤 자주 돌아다니는 말이 있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훨씬 풍요롭고 안락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많다는 이야기. 이 말이 냉정한 이유는 거의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연봉으로 동남아에서는 집안일과 육아를 타인에게 맡길 수 있고, 유럽 일부 도시에서는 걷기 좋은 동네와 공원과 깨끗한 공기가 기본값으로 제공되고, 북미 도시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주거 공간이 가능하다. 같은 숫자가 다른 모양의 삶을 만든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얹힌다. 한국에서 창업으로 고용을 만들고 부를 축적할수록 법적·행정적 부담이 누적되는 구조가 있다. 주 52시간, 노무, 세무, 공정거래, 상속. 각 규제의 취지는 정당하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동시에 걸렸을 때의 총합은 체감 비용이 된다. 정책이 기업인을 악인으로 상정한다기보다, 정책의 기본 가정이 '보호받아야 할 사람'과 '규제받아야 할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규제받는 쪽에 놓인 사람은 그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떠날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기는 순간, 이 무게가 떠남의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100억의 출구, 1000억의 눌러앉음
한 가지 흥미로운 관찰이 있다. 100억에서 200억 사이 구간에서 해외 이주가 많고, 그 이상이면 오히려 한국에 눌러앉는다는 이야기. 얼핏 직관에 반한다. 돈이 더 많을수록 자유로워야 할 텐데 왜 눌러앉는가.
답은 상속세다. 한국의 상속세 명목 최고세율은 50%, 최대주주 할증까지 포함하면 60%에 이른다.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직계비속 상속에 과세하는 OECD 18개국의 평균 최고세율은 27.1%로,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상속세가 아예 없는 OECD 회원국도 15개국에 이른다(한국경제).
이 지점에서 해외 사례가 내내 단골처럼 인용된다. 싱가포르는 2008년 상속세를 폐지했다. 당시 재무부의 논리는 단순했다. "세수 기여도는 낮은데 고액자산가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자산가 유입을 촉진한 결과, 폐지 5년 만에 인구가 10% 늘었다(한국경제).
더 상징적인 사례는 스웨덴이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분배 국가였던 스웨덴은 2004년 여야 합의로 상속세를 폐지했다. 전 세계 분배주의자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계기는 자국 기업들의 이탈이었다. 이케아 창업자 잉그바르 캄프라드는 상속세를 견디지 못하고 스위스로 국적을 옮겼고, 이케아 본사는 1982년 네덜란드로 이전했다. 스웨덴 정부가 분석해보니 상속세 세수는 전체의 0.3~2%에 불과한 반면, 떠난 기업들이 내던 법인세와 근로자의 소득세가 훨씬 컸다. 분배를 위해 상속세를 유지할수록 분배의 원천이 빠져나가는 역설이었다(머니투데이, 한국경제 2020).
이 사례들은 "부를 분배하려면 상속세를 높게 유지해야 한다"는 직관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율이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부자는 세금을 더 내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빠져나간 자리에는 분배할 원천 자체가 남지 않는 진공이 생긴다.
다시 한국의 계산으로 돌아오면, 결정을 가르는 것은 자산의 절대량이라기보다 자산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느냐다. 100억에서 200억대 자산가의 상당수는 현금성 자산의 비중이 높고, 이주 후에도 자산의 형태가 크게 망가지지 않는다. 이 구간에서는 "떠나는 비용"이 감당 가능한 수준에 머문다. 반면 자산의 핵심이 국내 기업의 경영 지분에 묶여 있으면 계산이 달라진다. 2018년 도입된 출국세, 가족 기업의 지배 구조, 이사회와 주주 간 계약 같은 실무적 매듭이 이주 비용을 크게 키운다. 자산 규모가 커지면서 지분·경영 비중도 함께 커지는 경우, 역설적으로 이주의 문턱이 더 높아지는 지점이 생긴다.
물론 이 경향은 절대 법칙이 아니다. 이케아 창업자가 세계적 거부임에도 스위스로 떠났던 것처럼, 결국은 개별 자산의 성격과 각자의 계산이 결정을 만든다. 다만 한국 시장 안에서 대략적으로 관찰되는 경향은 이렇다 — 돈의 절대량보다 떠나는 비용의 상대적 크기가 결정을 바꾼다. 많은 결정이 그렇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각자가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의 최적화다.
규제는 선택지 없는 사람에게 먼저 닿는다
업계에서 꽤 자주 나오는 말이 하나 있다. "부자를 겨냥한 규제를 만들면 부자는 빠져나가고, 남는 건 중간 층이 부담하는 구조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조심스럽게 풀어볼 필요는 있다. 규제가 부자에게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다. 자산을 해외로 재배치하거나 교육과 거주지를 옮길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규제의 구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관찰이다.
해외 송금 자체는 국내 거주자에게 결코 간단한 절차가 아니다. 고액 송금에는 한도와 사유 소명과 신고 의무가 뒤따른다. 그러나 이주라는 구조적 경로를 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민 단계에서의 자산 이동은 제도가 허용하는 경로이고, 거주지가 바뀐 뒤에는 과세 관할 자체가 달라진다. 한국 부유층의 일부는 이미 자산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분산하고, 자녀를 유학 보내고,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미리 확보해 둔다. 이들에게 한국의 과세 체계는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가 된다.
반면 자산이 국내 부동산과 근로소득에 묶여 있는 사람은 규제와 과세를 그대로 맞는다. 의도된 대상과 실제 부담자가 어긋나는 이 역설은 규모가 큰 규제일수록 종종 나타난다.
이 구조를 비판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떠남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같은 사회를 전혀 다르게 경험한다는 점만 기록해두고 싶다. 그리고 창업자가 대체로 전자에 속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왜 그들의 이주가 구조적으로 쉬워 보이는지 조금 더 분명해진다.
좁고 빠르게 큰 사회
떠남의 서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쉽게 잊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한국이 부자가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달러 안팎 수준이었다. 2024년 기준으로는 3만 6천 달러를 넘겼고, 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1인당 GDP를 추월했다(Trading Economics). 60여 년 사이 300배 이상 늘어난 숫자다. 같은 세대 안에서 부모는 보릿고개를 겪었고, 자식은 아이폰을 들고 유학을 간다. 이 속도는 기적에 가깝고, 기적은 대체로 성장통을 동반한다.
짧은 시간에 부의 분포가 극단으로 벌어졌다. 같은 세대 안에서 누구는 부모에게 집을 물려받고, 누구는 월세부터 시작한다. 누구는 1990년대의 저평가된 부동산을 쥐었고, 누구는 2020년대의 고평가된 부동산 앞에서 무력해졌다. 자산 가격이 근로 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국면에서, 근로 소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의 박탈감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급하게 자란 나라의 성장통에 가깝다.
게다가 한국은 좁다. 인구 5천만, 수도권에 절반 이상이 모여 있는 나라다. 좁은 공간에서 비교가 날카롭게 작동한다. 옆집이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자식을 어느 학교에 보내는지, 동창 중 누가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누군가의 성공이 자주 나의 상대적 실패로 번역된다. 좁고, 빠르게, 밀도 있게 비교되는 사회에서는 성공조차 피로가 된다.
떠남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중력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멀어지면 비교의 밀도도 얇아진다. 아무도 내가 어떤 아파트에 살았는지, 어느 회사 대표였는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모른다. 평가가 사라지는 자리에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가 들어선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 사이
여기서 관점을 한 번 돌려보고 싶다. 사람들이 해외 이주를 놓고 하는 대화는 대체로 "왜 떠나는가"에 집중된다. 세금이 무거워서, 교육이 답답해서, 공기가 나빠서. 하지만 더 흥미로운 질문은 "왜 대부분의 사람은 떠나지 않는가"다.
떠나지 않는 것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고 후자는 조건이다. 그런데 일상 언어에서 두 단어는 자주 뒤섞인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안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 행동은 같은 궤적을 그린다. 못하다가, 못하다가, 할 수 있게 되니까 비로소 한다. 해외 이주, 이직, 창업, 결혼, 이혼, 독립, 관계의 끝. 욕망의 기본 작동 원리는 단순하다. 가능성이 생겨야 실행이 따라온다.
욕망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대체로 누구에게나 있다. 이루고 싶고, 달라지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 다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가능성의 문턱이 필요하고, 그 문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
'못 한다'가 '안 한다'로 바뀐다
나이가 들수록 자산, 가족, 경력, 평판 같은 고정값이 쌓인다. 고정값이 쌓이면 불확실성의 비용이 커진다. 같은 결정이라도 스무 살일 때와 마흔 살일 때의 무게가 다르다. 마흔에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로 간다는 결정에는, 스무 살에 배낭 하나 메고 떠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정값의 재배치가 뒤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을 시작한다. "하고 싶은데 못 한다"가 "원래 내 취향이 아니다"로, "지금은 때가 아니다"로, "현실적으로 어렵다"로, "나이 먹어서 못 한다"로 바뀐다. 이 번역은 대개 무의식적이다. 자기 자신도 속는다. 속아야만 마음이 편하다.
'안 한다'는 말은 종종 '못 한다'의 완곡한 표현이다.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언어의 완충재다. 그러나 완충재 아래에는 실제로 가능성의 문턱에 가 닿지 못한 채 멈춰선 욕망이 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언젠가 문턱이 낮아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창업자에게 이주가 쉬운 이유
창업자는 이미 불확실성의 가격을 치러본 사람이다. 폐업, 자본 잠식, 투자자의 외면, 팀의 이탈, 제품의 실패.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겪어보면 안다. 최악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부분의 불확실성이 예상만큼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 학습은 이주 결정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보통 사람에게 "떠나서 적응 못 하면 어쩌지"라는 질문은 치명적인 공포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 망해봤던 사람에게는 그 공포의 크기가 다르다. 비교 대상이 있다. 적응 못 하는 정도는 회사 망한 정도에 비하면 가볍다. 이미 치러본 대가 앞에서는 새 대가가 덜 무겁게 느껴진다.
여기에 자본까지 쌓였다면 숫자는 더 단순해진다. 실패해도 안전하다는 감각. 돌아올 수 있다는 감각. 그것이 이주를 '결심'이 아니라 '선택지 중 하나'로 만든다. 떠나는 사람들이 특별히 대담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결정 앞에 섰을 때 각자가 느끼는 불확실성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대담함의 차이가 아니라, 저마다 쌓아온 비용 구조의 차이다.
리셋이라는 매력
떠남의 이유를 세금과 교육과 공기와 의료로만 설명하면, 설명되지 않는 큰 부분이 남는다. 그것은 관계다.
누적된 관계에는 무게가 있다. 10년, 20년 쌓인 인연 안에는 고마움과 빚과 기대와 역할이 한데 얽혀 있다. 그 인연들이 귀중한 만큼, 가끔은 그 총합이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지난 시간이 나를 규정한 만큼, 그 규정에서 벗어나 다른 모양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꼭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나 자신에게서 잠시 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제로부터 시작하는 삶. 지금부터 다시 만들어지는 관계와 환경. 이 상상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시기가 사람에게 있다. 해외 이주는 이 매력에 가장 가까운 답안 중 하나다. 국경을 넘으면 물리적 거리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를 규정해 왔던 호칭과 역할과 기대와 평판이 한꺼번에 초기화된다. 누구의 선배도 아니고, 누구의 친구도 아니고, 누구 회사 대표도 아닌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초기화가 공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해방이다.
짐작컨대 해외로 떠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떠난 이유는 세금도, 교육도, 공기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저 더는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상태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이 이유는 표면적으로 말하기 어렵고, 그래서 세금과 교육과 공기가 대신 자리를 차지한다.
양쪽이 모두 이해될 때
그래서 떠나는 사람 편인가, 남는 사람 편인가. 어느 쪽도 아니다. 양쪽 모두 이해된다.
징벌적이라 불리는 세금제도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그 누진적 구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가성비 사회는 성립하지 않는다. 국밥 한 그릇이 삼만 원이 되는 나라에서 지금 한국의 일상은 운영되지 않는다. 상위 소수가 전체 세금의 상당 부분을 떠맡는 구조는 얼핏 불공평해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이 사회를 떠받치는 숨은 기둥이기도 하다. 그 기둥을 두드리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고, 기둥이 싫어서 떠나는 사람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쪽에서는 "왜 성공한 사람을 잠재적 악인 취급하느냐"고 묻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는다. 둘 다 틀리지 않다. 이 사회는 두 감각 사이의 미묘한 균형 위에 서 있고, 균형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 때마다 누군가는 불편해진다. 불편해진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안에서 바꾸려 하거나, 밖으로 나가거나. 어느 쪽이든 합리적이다.
나는 이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다. 세제 설계도, 이민 정책도, 거시 경제의 균형점도 전공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나보다 훨씬 더 깊이 고민해줄 것이라 믿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감시하는 정도의 역할만 감당한다. 다만 관찰은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무엇이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지, 누구에게는 왜 그 선택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는지.
이유가 아니라 가능성
세금, 교육, 공기, 상속, 의료, 문화. 사람들이 대는 이유들은 전부 사실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을 가르는 것은 가치관이 아니라 임계점이다. 그리고 임계점은 대부분, 살아보기 전에는 어디쯤인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왜 떠나냐"는 질문은 종종 틀린 질문이다. 떠날 수 있어서 떠난다. 남을 수 있어서 남는 것이 아니라, 아직 떠날 수 없어서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차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남의 선택을 쉽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나는 안 해"라는 말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 말 아래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카페를 나와 걷던 길의 끝에 다시 현충원이 보였다. 옆 테이블에서 스친 한 문장이 이 정도의 생각을 끌고 올 줄은 몰랐다. 떠나는 이야기와 남은 이야기는 서로 다른 장르 같지만, 결국 같은 질문의 두 얼굴이다. 여기에 있을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여기를 떠날 수 있는가. 둘 중 하나라도 분명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