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에 유독 한 사람이 있다. 회의 때마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한다. 점심시간에 그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한숨을 쉰다.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일이 훨씬 수월할 텐데."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나중에 돌아보면 그 사람이 있던 시기에 가장 많이 성장해 있었다. 편하게 일했던 시기에는 별로 남는 게 없었는데, 불편했던 시기에는 뭔가 단단해져 있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자주 반복되는 패턴이다.
좋은 팀을 생각하면 보통 이런 그림이 떠오른다. 서로 잘 통하고, 갈등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회의에서 금방 합의가 이루어지는 팀. 실제로 그런 팀에서 일하면 정말 편하다. 스트레스가 적고, 일상이 예측 가능하고, 퇴근 후에도 마음이 가볍다.
문제는 그 편안함 속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한 번도 도전받지 않고, 내 방식은 한 번도 의심받지 않고, 내 기준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건 조화가 아니라 정체다. 근육은 저항이 있어야 자란다. 아무런 부하도 없는 운동은 운동이 아니다. 팀에서의 불편함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관점이 부딪혀야 내 관점이 날카로워진다.
불편한 사람과 일하면 처음에는 짜증만 쌓인다. "왜 저렇게밖에 생각을 못 하지?" "왜 매번 반대만 하지?" 감정의 화살이 전부 상대를 향한다. 나는 관찰자이고, 상대는 문제의 원인이다. 이 구도에서는 공감이 생길 여지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왜 반대만 하지?"였던 것이, "아, 이 사람은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는구나"로 바뀐다. 감정의 방향이 바깥에서 안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상대를 판단하던 시선이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선으로 바뀌는 것. 이 전환이 일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불편함을 견디는 과정이 필요하다. 편한 관계에서는 이 전환이 일어날 이유 자체가 없다.
불편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가장 극적으로 뒤집히는 순간은, 함께 위기를 겪을 때다. 프로젝트가 무너지기 직전, 장애가 터져서 밤을 새야 할 때, 예상치 못한 문제로 모두가 막막할 때. 그 순간에 평소 불편했던 사람이 묵묵히 자기 몫을 해내는 걸 보면, 감정의 지형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사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이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깨달음이다. 평소에 아무리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지"라고 되뇌어봐야 감정은 바뀌지 않는다. 직접 같이 넘어지고, 같이 일어서는 경험을 해야 한다. 위기는 잔인하지만,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본질을 함께 목격한 관계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물론 모든 불편함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인격을 무시하는 불편함, 권력을 이용한 불편함, 악의가 담긴 불편함은 사람을 성장시키지 않고 파괴한다. 좋은 불편함과 나쁜 불편함을 가르는 기준은 하나다.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
신뢰가 있는 관계에서의 불편함은 건설적이다. "이 사람이 날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더 나은 결과를 원하는 거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뢰가 없는 관계에서의 불편함은 파괴적이다. 상대의 모든 행동이 위협으로 해석되고, 방어만 하다 지치게 된다. 건설적 갈등은 문제에 초점이 있고, 파괴적 갈등은 사람에 초점이 있다. 같은 수준의 불편함이라도,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정반대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짚고 넘어가자. "불편한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말이 "싫은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좋아함은 감정이고, 공감은 이해다. 싫은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려고 하면 자기기만이 된다. 하지만 싫은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하면, 내 세계가 넓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못한다. 싫은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든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쓸 때마다 내 판단의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는 건 분명히 느낀다. 한 가지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던 시야가, 두 가지, 세 가지로 늘어나는 경험. 그건 편한 사람들과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경험이다.
지금까지 "불편한 사람"을 항상 상대방으로 놓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점을 뒤집어 보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다. 아니, 거의 확실히 그렇다.
내가 던지는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짜증스러운 반박으로 들릴 수 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불합리한 잣대일 수 있다. 내가 효율적이라고 믿는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상대의 불편함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저 사람은 왜 저래?"에서 "나도 저런 존재일 수 있겠구나"로.
편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일상은 좋아진다. 하지만 일상이 좋아지는 것과 내가 성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성장은 대부분 불편한 곳에서 시작된다. 내 생각이 도전받는 순간, 내 방식이 의문시되는 순간,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
그 순간을 만들어주는 건 책이나 강연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그러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의도와 무관하게, 내게 성장의 기회를 만든다.
지금 당신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쩌면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