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문장이다. 혹은 스스로 내뱉어본 문장이다. 회의에서 의견을 못 내는 사람은 "나는 원래 내성적이라서",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사람은 "나는 원래 쉽게 질려서", 남의 부탁을 거절 못 하는 사람은 "나는 원래 착한 사람이라서". 성격이라는 단어 뒤에 숨으면, 어떤 행동이든 설명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문장이 불편해졌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 속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숨어 있다. '그러니까 바꿀 수 없어', '그러니까 이해해줘',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야'. 가만히 뜯어보면, 이건 자기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면책하는 것에 가깝다.
자신의 행위에 합리적인 이유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이다. 그리고 '성격'은 그 욕망을 채우기에 너무 편리한 도구다. 한 번 붙이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피난처처럼 안전하니까.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밖에서 보는 것이다. "저 사람은 유전적으로 외향적이다", "저 사람은 어린 시절 환경 때문에 그렇다." 관찰자의 시점. 과학적이고 객관적이지만, 거기에 '나'라는 주체는 없다.
다른 하나는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원해서 이렇게 했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판단해서 이렇게 선택했다." 나의 욕망과 판단이 근거가 되는, 주체적인 설명이다.
성격 탓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관찰자가 실험 대상을 분석하듯.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그 '저 사람'이 바로 나인데.
"왜 화를 냈어?"라는 질문에 "나는 원래 급한 성격이라서"라고 답하는 것과, "상대방이 약속을 세 번째 어겼고, 나는 신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참기 어려웠다"라고 답하는 것. 같은 분노인데 설명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성격에 떠넘긴 것이고, 후자는 자신의 행위를 이해한 것이다. 내 행동의 이유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행동의 주인이 된다. 반대로, 성격에 위임해버리면 나는 내 행동의 관객이 된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야 해."
얼핏 들으면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같은 구조다. '착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먼저 있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진정한 도움은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에서 나온다. 성격이 아니라 판단이 행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SNS가 많은 것을 바꿨다. 보통은 비교의 원천, 우울의 촉매 정도로 이야기되지만, 다른 면도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권위자가 정보를 독점했고, 그 독점이 카리스마를 만들었다. 카리스마는 꾸며진 겉모습에서 나올 뿐이다. SNS는 그 독점을 무너뜨렸다. 물론 온갖 가짜뉴스가 혼란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감각도 키워준다.
결국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는 것. 성격에 기대는 대신 스스로 판단하는 것.
이충녕의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를 읽으며 이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분열은 혼란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을 쓰기 전에, 한 번 멈춰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정말 원래 그런 건가?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게 편한 건가?
피난처는 따뜻하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면 바깥세상을 잊는다. 불편하더라도, 내 행동의 이유를 나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이 한 문장이, 성격이라는 피난처에서 나오는 첫걸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