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줄 것인가 — 이기적 이타주의자의 What

Written by Theo2026년 3월 27일 · 3 min read

무엇을 줄 것인가

모든 일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에 시간을 쓴다. 어떤 기술을 배울까, 어떤 도구를 쓸까, 어떤 순서로 실행할까.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내 삶에서 가장 큰 변곡점은 항상 전자를 제대로 정의했을 때 찾아왔다.

나침반과 노

배를 젓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나침반과 노. 노를 잘 젓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나침반 없이 노만 힘껏 저으면 방향 없는 원을 그릴 뿐이다. What은 나침반이고, How는 노다.

제품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팀은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데 쓴다. 디자이너든 개발자든 마케터든, 직군에 상관없이 모두가 이 질문 앞에 선다. 정작 코드를 작성하고, 디자인을 그리고, 캠페인을 실행하는 건 서너 시간이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검증까지 포함해도 그렇다. 아니다 싶으면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 실행이 빠른 건 우리가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다. What이 명확하면 How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수렴한다.

AI가 이 구도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예전에는 실행 자체가 진입장벽이었다. 코드를 짜려면 개발을 배워야 했고, 디자인을 하려면 도구를 익혀야 했다. 지금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든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는 시대다. How의 민주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남는 건 뭘까. What이다.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 어떤 고객의 어떤 고통을 해소할 것인가. 이걸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의 가치가 전에 없이 높아졌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고

나는 주니어와 시니어를 가르는 기준이 실력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바텀업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수단에서 출발해서 결과를 기대하는 방식이다. 반면 탑다운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1억을 벌려면 뭘 해야 할까." 목표에서 출발해서 수단을 역으로 찾는다. 1억을 버는 방법은 수십 가지다. 취업을 해도 되고, 물건을 떼와서 팔아도 되고, 서비스를 만들어도 된다. 탑다운으로 보면 선택지가 열린다. 바텀업으로 보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에 갇힌다.

이건 커리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케팅을 배우면 취업할 수 있지 않을까"는 바텀업이다. "내가 80대에 어떤 노인이고 싶은가"에서 역산해서 지금 뭘 해야 할지 찾는 건 탑다운이다. 후자의 시야에서 보면, 마케팅을 배우는 것도, 창업을 해보는 것도, 전혀 다른 업종에서 일해보는 것도 전부 같은 목표를 향한 서로 다른 경로일 뿐이다. 하나가 막히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탑다운 사고를 훈련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건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찾는 방법이지, 풀어야 할 문제를 정의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전환에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한 번 이 관점을 갖게 되면, 같은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기버의 두 운명

이 What의 감각은 일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아담 그랜트의 프레임을 빌리면, 세상에는 기버(주는 사람), 테이커(받는 사람), 매처(주고받는 사람)가 있다. 흥미로운 건 부의 순위를 매겨보면 상위 1%에 테이커가 많고, 하위 1%에 기버가 많다는 점이다. 주기만 하는 사람이 제일 밑바닥에 있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자기 것을 끝없이 내어주면 남는 게 없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상위 0.1%, 정말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 기버다. 같은 기버인데 누구는 바닥에, 누구는 꼭대기에 있다. 무엇이 이 둘을 갈라놓았을까.

목적성이다. "무엇을 줄 것인가"를 아는 기버와, 그냥 하염없이 주는 기버의 차이다.

하염없이 주는 것은 관대함이 아니라 방향 없음이다. 누가 도움을 요청하든, 어떤 상황이든, 일단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이것은 미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자원을 가장 비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방식이다. 나침반 없이 노를 젓는 것과 같다.

반면 목적 있는 기버는 다르다. 이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상대의 결핍이 어디에 있는지를 읽고, 거기에 정확히 맞는 것을 건넨다. 열 가지를 주는 대신 딱 한 가지를 주되, 그 한 가지가 상대의 삶에 실제로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도 결국 What이다. "무엇을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두 번 글을 쓴 적이 있다. 한 번은 아담 그랜트의 책을 읽고 성공한 기버와 실패한 기버의 차이에 대해 정리했고, 다른 한 번은 그 프레임을 내 삶에 대입해 이기적인 이타주의자의 역설이라는 글을 썼다. 그때는 "누구에게 줄 것인가"와 "왜 주는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글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무엇을 줄 것인가"를 묻고 있다.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건네는 사람

경험이 쌓이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후배나 주니어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건 해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해"라고 말해주면 그 순간은 편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또 물어봐야 한다. How를 줬기 때문이다. 반면 "네가 진짜 풀고 싶은 문제가 뭔데?"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나침반을 꺼내야 한다. 불편하지만, 이 경험이 쌓이면 스스로 방향을 잡는 사람이 된다. What을 줬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결핍을 빨리 읽으려고 한다. 여기서 결핍이라 함은 부족함이 아니다. 이 사람이 지금 가장 원하지만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 혹은 본인도 아직 언어화하지 못한 욕구다. 그걸 찾아서 거울처럼 비춰주면,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답을 찾는다. 내가 한 건 해답을 준 게 아니라, 질문을 정의해 준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나보다 5년에서 7년 정도 더 경험해본 사람을 두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해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내가 아직 모르는 What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아직 서보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풍경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 해답을 주는 멘토가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노를 젓는 힘은 그대로인데 도착하는 곳이 완전히 달라진다.

씨앗을 고르는 일

결국 What을 정의하는 능력은 제품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내 커리어에서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내 관계에서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내 삶에서 어떤 씨앗을 심을 것인가. 전부 같은 질문이다. 밭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 건 How다.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성실하면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씨앗을 심을지 고르는 건 What이다. 이 선택이 수확의 질을 결정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노를 더 세게 저으려고 한다. 더 효율적인 도구를 찾고, 더 빠른 방법론을 익히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한다. 그 노력 자체는 훌륭하다. 하지만 가끔은 노를 내려놓고 나침반을 꺼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가는 이 방향이 맞는가. 내가 지금 풀고 있는 이 문제가 정말 풀어야 할 문제인가. 내가 지금 주고 있는 이것이 정말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서는 것이 불편하다면, 아마 지금이 나침반을 꺼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