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이야기의 작가는 누구인가

Written by Theo2026년 3월 27일 · 3 min read

시리즈의 글 (3개)

  1. 뇌는 설명하고 싶다
  2. 확신이 강할수록 의심해야 하는 이유
  3. 나라는 이야기의 작가는 누구인가

나라는 이야기의 작가는 누구인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이 흩어져 있다. 우리는 그 별들을 보고 별자리를 찾는다. 곰을 닮았다, 전갈을 닮았다, 국자를 닮았다. 하지만 별들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곰의 형상도, 전갈의 꼬리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 광년 떨어진 별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묶은 건 순전히 우리 뇌의 작업이다.

그런데 별자리만 그런 걸까.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는 아닐까. 머릿속의 생각을 단지 흐름으로 보지 않고, 구체적인 '대상'으로 붙잡아서 '나'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건 아닐까. 가자니가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렸다. 자아는 좌뇌의 해석 장치가 만든 이야기라고.

소설 같은 자아

앞선 글들에서 좌뇌의 해석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확신을 만들어내는지 이야기했다. 빈칸을 채우고,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고, 거기에 절대적 확신까지 부여하는 좌뇌. 가자니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해석 장치의 궁극적인 작품이 바로 '자아'라고.

가자니가는 1998년 저서 《마음의 과거(The Mind's Past)》에서 이를 '소설 같은 자아(The Fictional Self)'라고 명명했다. 자아가 소설처럼 지어낸 것이라니. 이것은 마치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일 수 있다. 하지만 가자니가는 이것이 실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사건과 경험. 좌뇌는 이것들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나는 이런 이유로 이 선택을 했다". 이 서사가 곧 '나'다. 하지만 분리뇌 연구가 보여주듯, 이 서사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이 아니다. 해석 장치가 가용한 정보만으로 짜맞춘 이야기다. 때로는 빈칸을 상상으로 채우고, 때로는 현실을 무시하면서.

마음이 해석을 만든다

자아가 구성물이라는 증거는 분리뇌 연구 외에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감정과 각성 상태가 해석을 바꾸는 실험들이 인상적이다.

유명한 '흔들다리 실험'이 있다. 남성 피험자들에게 두 가지 다리를 건너게 했다. 하나는 안전한 다리, 다른 하나는 높이 1.5미터의 가파르고 흔들리는 위험한 다리. 다리를 건넌 뒤, 다리 끝에서 여성 조교가 설문지를 건네고 연락처를 알려줬다. 결과는 놀라웠다. 위험한 다리를 건넌 남성들이 여성 조교에게 훨씬 더 많이 전화를 걸었다. 그들의 뇌는 다리에서 느낀 신체적 흥분(심장 박동, 땀, 긴장)을 여성에 대한 매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탄 뒤 연인의 사진을 보면 매력 점수가 올라간다는 연구도 있다. 흥분 상태에서 유발된 각성을, 좌뇌가 "이 사람이 매력적이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 이야기보다 당신의 좌뇌에 이미 연인이 있다면 어떤 놀이기구도, 어떤 감성적 자극도 낯선 사람의 매력도를 높이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 판단, 끌림의 상당 부분이 상황에 의해 촉발된 신체 반응을 좌뇌가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화가 나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신경계가 흥분한 상태에서 좌뇌가 "화"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일 수 있다.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좌뇌가 "두려움"이라는 서사를 입히는 것일 수 있다.

2500년 전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가자니가의 연구를 접하고 놀란 것이 하나 있다. 동양의 영적 전통에서 2500년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해온 것을 현대 신경과학이 실험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는 무아(無我)를 말한다.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가르침이다. 도교 경전인 도덕경과 힌두교의 불이일원론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자아란 임의적인 움직임 속에서 어떤 패턴을 보려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그토록 개발하려 애쓰는 자아란, 실은 지어낸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자아가 허상임을 깨달으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동양 철학은 가르친다. 어떻게 그런 관계가 성립하는 걸까. 좌뇌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인간으로서 겪는 내적 고통의 가장 두드러진 원인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가 하는 직장 동료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 확신이 점점 심각해져서 출근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동료들에게 직접 물었더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좌뇌가 단편적인 정보로 만든 이야기에 자기 자신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서양 심리학은 이 통찰을 경험적으로 찾아왔다. 실험을 통해, 그 의도도 없이 우연히 찾아왔다. 가자니가도 이렇게 말한다. 좌뇌의 해석 장치를 인식하는 것이 그 힘을 줄이는 시작이라고.

이야기를 알아차리는 순간

지금부터 10초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고,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마음속으로 나열해 보라. 나 끝나면 다시 읽기로 돌아온다.

무엇을 나열했나. 아마도 책상, 의자, 나무, 차, 컴퓨터 같은 사물일 것이다. 하지만 빈 공간을 나열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볼 때 보이는 것 중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이 바로 빈 공간인데도, 좌뇌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한다. 빈 공간은 무시된다. 자아도 이와 같다. 무수한 경험의 흐름 속에서 좌뇌가 특정한 것들만 골라 '나'라는 이름으로 묶은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자. 교통 체증의 한가운데서 어떤 차가 불쑥 내 앞을 끼어든다. 즉각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면 즉시 호감이 생긴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뭔가 있는 게 있는 모양이군", "저 사람 나한테 관심 있나 봐". 이 목소리가 해석 장치의 작동이다.

해석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많은 경우 좌뇌의 해석 장치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기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건을 보고 판단하고 해석을 믿은 뒤에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석 장치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 한 가지가 달라진다. "방금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이 판단, 이것은 사실인가 해석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비록 해석 장치는 항상 켜져 있고 끌 수 없지만, 일단 그것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한 번이라도 눈치채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가 트인다. 머릿속의 '나'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인정하는 대신, "방금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이 판단은 사실일까 해석일까"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좌뇌의 해석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이전만큼 우리의 정신과 감정을 강하게 흔들지 못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고통은 감소될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찾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별 자체가 아니라 내가 만든 패턴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같은 하늘이 다르게 보인다. '나'를 들여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실수를 날마다 저지르는 것도, 같은 감정에 매번 휘둘리는 것도, 어쩌면 '나'라는 게 있다고 믿기 때문일 수 있다. 이야기의 작가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것. 거기서부터 다른 종류의 자유가 시작된다.